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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금술사[Alchemist] - 파울로 코엘료

by 너역시 2021. 1.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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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을 즐겨 읽지 않는 독서 버릇 때문인지 이 책이 언제 어떻게 내게 와닿았는지 기억이 잘 안 난다. 아마 책 앞쪽에 오래전 만났던 여자 친구 이름이 적혀 있는데 선물 받은 듯하다. 그래도 10년은 넘게 내 책장에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지금보단 어렸던 그 시절에 읽은 기억을 꺼내보면 기독교적인 요소가 들어간 책, 꿈을 이루기 위해 떠나는 산티아고, 사막에 대해 떠올렸던 이미지, 읽기 어렵지 않았던 책 정도의 느낌만 남아있다.

 

그런 기억이 영향을 미쳤던 것일까? 속독에 관심이 있는 요즘, 연습이라도 해볼 겸 이해력을 많이 요구하지 않는 책을 뒤적거리다가 아무 생각 없이 책장에서 연금술사를 꺼내 들었다. 시간이 흘러 같은 책을 본다는 것이 나의 변화를 확인하는 계기가 될 줄은 미쳐 생각하지 못했었다. 덤덤한 문체로 펼쳐지는 서사 속에서 잠시나마 사색할 수 있었던 이 책을 통해 나의 변화를 마주할 수 있었다.

 

사실 책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간단하다. 양치기인 산티아고라는 소년은 어떤 아이가 자신을 피라미드로 데려가며 여기에 오면 보물을 찾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는 꿈을 반복적으로 꾸고, 꿈의 해몽을 위해 점쟁이 노파를 찾아간다. 노파는 산티아고에게 피라미드로 가게 될 거라며 말하지만 산티아고는 믿지 않았다. 그러나 '늙은 왕 멜기세덱'을 만나 같은 이야기를 듣게 되어 확신하고 보물을 찾는 여정을 시작한다. 여행 초반에 여행경비를 모두 잃어버리고, 잠시 크리스털 가게에서 일하며 다시 양치기 생활로 돌아가려 자금을 모으지만, 운명의 끌림 앞에 다시 여행을 시작하여 마침내 사막을 통과하며 보물을 찾게 되는 이야기다.

 

사실 이번에 책을 읽어보고 나서 '마침내 보물을 찾았다.'라는 점에서 별다른 감흥을 느낄 수 없었다. 작가인 파울로 코엘료도 마지막 에필로그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지 않고 마무리하는 느낌이다. 정작 내게 많은 생각들을 하게 만든 건 산티아고가 여행을 하며 만났던 상황들, 또 거기에 반응하며 점점 변해가는 성장의 모습들이었다.

진짜 작가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이런 것들이 아니었을까? 싶은 이야기를 적어보고자 한다.

 

짧은 이야기, 하지만 책이 담겨 있는 이야기

 

책을 펼치면 처음 마주하는 이 짧은 이야기에 멈춰 사색을 하게 된다. 괜히 소설이 시작되기도 전에 이런 글을 여기에 넣었을 리 없다. 나르시시즘의 유래가 되는 '나르키소스의 죽음' 이후의 비하인드 스토리. 호수의 관점으로 이야기하는 게 신선하다. 하지만 왜 연금술사는 이 이야기가 아름답다고 했을까? '호수도 나르시시즘에 도취된 것 아닌가?' 란 의문을 자아내면서, 연금술사의 감탄이 전혀 와닿지 않는 걸 느꼈다.

 

자신의 신화를 살면서 외부의 환경과 타인에 열려 있어야

 

호수와 나르키소스는 서로를 통해 자신의 아름다움을 본다. 서로를 통해 바라봄에선 공통점이 있지만, 서로에게 타인인 존재로써 인식하는 점에서는 확연한 차이점이 있다. 나르키소스는 자신의 만족만을 채우려고 호수를 통해 자신의 아름다움을 본다. 호수는 나르키소스에게 수단이다. 철저히 자신을 둘러싼 환경과 타인에 대해 닫혀 있다. 오로지 자신만 있고, 자신의 목적 달성만 중요하다. 자기 자신이 아닌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에 따라 자신을 규정하고 있다.

 

반면 호수는 '흘러감, 투영됨' 이란 자신의 신화를 살아내는 와중에 찾아온 나르키소스를 통해 자신의 아름다움을 바라본다. 자신의 아름다움을 나르키소스의 눈을 통해 '볼 수 있게 되어서' 본 것이다. 자신이 아름다움을 모르기 때문이 아니다. 다만 나르키소슷 처럼 아름다움이란 가치가 자신의 존재를 규정하는 절대적 진리가 아니었던 것이다. 호수에게 삶의 최선은 자신이 호수이기에 있어야 할 곳에 있는 일, 고여있는 물의 속성을  호수에게 아름다움은 나르키소스를 통해 찾아온 예기치 못한 기쁨이 아니었을까?

 

호수가 애도하는 이유는 자신의 아름다움을 비춰주는 '존재의 부재'에서 오는 상실감으로 인한 것이지, '아름다움을 볼 수 없다'라는 사실만으로 애도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자신의 아름다움을 보지 못한다는 이유만으로 나르키소스의 죽음을 애도하는 거라면 이 이야기는 아름다울 수 없다. 둘 다 똑같은 나르시시즘에 병든 것일 뿐.

 

호수가 나르키소스를 '존재'로 대했다는 것은 오레이아스들에게 하는 질문에도 발견할 수 있다.

 

"나르키소스가 그렇게 아름다웠나요?"

 

자신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는데 중독되어, 타인의 아름다움을 알아보지 못하는 호수라고도 생각이 들 수 있다. 그러나 이야기를 호수는 나르키소스를 '아름답다, 아름답지 않다'라는 기준의 잣대로 평가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저 자신에게 다가와 자신의 아름다움을 비춰주는 존재로써 나르키소스를 받아들였을 뿐.

 

같은 생각, 다른 이유

 

사실 호수 입장에서 보자면 나르키소스의 죽음으로 2가지 슬픔을 견뎌야 한다. 내 곁에 있던 존재의 상실감과 자신의 아름다움을 볼 수 없다는 2가지 이유. 그런데 아름다움을 볼 수 없는 것은 슬픈 것이란 목소리는 내는 등장인물이 또 있다. 바로 오레이아스들이다. 아름다움을 볼 수 없는 것은 슬픈 일이라고 생각하는 점에서 오레이아스들과 호수는 같아 보이지만, 외부의 아름다움을 볼 수 없어 슬퍼한다는 점과 자신의 아름다움을 볼 수 없어 슬퍼하는 호수는 분명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

 

'나'로부터 가 아닌 어떤 외부의 것에 끌려다니는 순간(중독) 또는 나의 어떤 가치가 규정되는 순간, 그 가치는 내게 폭력이 된다. 그것이 나의 정체성을 결정하려 하기 때문에, 또 그것이 내게 결핍감을 선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의 정체성이 나로 인해 규정되고 외부로부터 내게 와닿는 것은 나의 정체성을 성장시키는 통로가 될지언정 고통은 될 수 없다.

두 가지 사실을 한 줄로 요약하면 이렇게 될 것 같다.

'나'이기 때문에 '나로서 살되, '나'만 있는 것처럼 살지 말고, 타인과 세상에 열린 태도로 살라

 

하고 후회하자는 마음으로

 

 

실패는 언제나 우리의 한계를 의미하는 것처럼 보인다. 많은 사람들이 어떤 일에 도전하고 실패를 경험한다. 실패를 통해 정체성이 규정되버린 내 내면의 목소리는 대부분 부정적이다.

'내가 하는 일이 그렇지 뭐' ,'
내가 그렇지 뭐'

 

일만 탓하면 다행인데, 자신의 존재마저도 실패작으로 쉽게 치부한다. 다시 일을 도모해보려는 시도는 덧없다.

열정이 크기는 괴리감과 자괴감의 크기로 치환되어 열등감이란 결괏값만 내놓을 뿐이다. 그래도 살아야 한다. 시간을 흐르고 뭐라도 해야 생존 가능하니까. 이전의 익숙한 삶의 방식, 벗어나고 싶었지만 익숙하다는 이유로 그 환경으로 돌아가 참으며 살아간다. 하지만 알 수 없는 찝찝함이 계속 마음 한편에 남아있다.

 

사람들은 삶의 이유를 무척 빨리 배우는 것 같아. 아마도 그래서 그토록 빨리 포기하는지도 몰라. 그래, 그런 게 바로 세상이지.
연금술사 P.50

 

책에서는 1부 후반부부터 2장 초반부까지 적지 않은 분량을 '익숙함' 이란 주제를 놓고 이야기한다. 자신의 신화를 이루기 위해 자신이 익숙하게 살던 환경과 생활방식을 뒤로한 채 떠나는 산티아고의 모습. 그나마 현실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우리들의 모습들인 것 같다. 다들 시작은 좋다. 사업을 하든, 공부를 하든, 새로운 연인을 만나든 처음엔 다들 익숙함을 잘 떠난다. 하지만 여행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자신의 모든 여행경비를 도둑맞는 시련을 당한 산티아고처럼, 이전에 경험해보지 못한 어려움에 봉착하면 극복하려고 하기보다는 실패로 간주하고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려 한다. 크리스털 가게에서 일하며 양치기의 삶으로 돌아가기 위해, 양을 살 돈을 모으려는 산티아고처럼.

 

이 대목에서 등장하는 인물이 있는데 크리스털 상점 주인이다. 언뜻 보면 인생을 현명하게 사는 것처럼 보인다. 산티아고와 이야기하는 것으로 보아 생각 없이 인생을 사는 양반은 아닌 것 같다. 익숙함이라는 타성에 젖어 있는 것만 빼면.

크리스털 가게 주인도 꿈이 있다. 하지만 자신의 꿈을 이룬 뒤 살아갈 이야기 없어질까 봐 두려워한다는 이야기를 하며 현재의 삶에 만족한다고 이야기한다. 산티아고로 인해 가게가 흥해도 자신의 생활방식이 변하는 것은 원치 않는다며, 이 가게의 규모와 이만큼의 손님에 익숙해져 있다며 자신의 상황에 만족한다고 산티아고에게 이야기한다.

 

실패와 익숙함

사실 실패와 익숙함은 당사자가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부정적으로든 긍정적으로든 상호보완적인 위치에 있다. 실패가 나의 한계를 정하는 사건이 되어버리면 익숙함은 이전 삶으로의 복귀라는 이상향으로 내게 솔루션으로 다가온다. 다만 패배감은 덤이다. 어떻게든 나의 한계를 경험한 이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선 그렇게라도 해야 한다. 이전의 삶으로 복귀한 후에도 그 꿈은 내 마음에 남아 나를 괴롭히겠지만. 크리스털 가게 주인 같은 모습이다. 이런 상태에 놓여있으면 '꿈을 가져라, 자신의 삶을 살라.'라는 슬로건들이 마치 정신적인 폭력처럼 느껴진다.

 

반대로 실패가 나의 임계점이 되는 사건이 되려면 익숙함은 나에게 한 번 더 도전할 수 있는 든든한 지원군이 된다. 익숙함이란 것이 내가 삶을 어떻게 살아왔다는 완벽한 증거이기 때문이다. 언제든 돌아갈 수 있기 때문에 한 번 더 해보자는 마음을 먹을 수 있게 해 준다. 내가 나를 패배자의 위치로 전락시키지 않는 이상, 앞으로 계속 나아갈 원동력이 된다. 산티아고의 모습이다.

 

'도전과 포기'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다. 그리고 도전을 계속하라고 이야기해 주고 싶다. 하지만 도전을 해야 하는 이유보다 포기함에 따르는 대가를 이야기하는 게 더 현실적인 충고가 되지 않을까 한다. 도전은 스스로 결단해서 하는 것이지 누가 합당한 이유를 준다 해서 먹을 수 있는 마음 상태가 아니기 때문이다.

 

포기하는 경험이 쌓이는 것이 정말 무서운 게 뭐냐면 어떤 일도 시작을 못 하게 되는 지경까지 이르게 한다는 것이다. 뭐든지 회피하려고 하고, 경험이 없는데 안될 거라며 단정 짓는다. 이젠 마음의 힘이 없다는 핑계도 머릿속을 꽉 채운다. 하지만 그것이 자신이 자신에게 하는 거짓말이다. 말이 좋아 합리화지 자기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경험이 없어서 판단할 근거가 없는데, 될지 안 될지 어떻게 아는가?
마음의 힘이 없다면서 완강한 거부를 하고 있는 이 힘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인가?

 

이렇게 글로 쓰면 세상에 이런 비상식적인 말이 없는데, 우리는 이런 합리화와 일반화에 너무 쉽게 굴복하고, 인지조차 못한 채로 살 때가 너무 많은 것 같다. 반성하게 된다. 정말 많이.

내 마음을 내가 실패에 길들인 것일 뿐, 오늘은 어제와 다르고 내일은 오늘과 다르다. 매일이 다른 날이고 새로운 날이다. 일보 전진을 위해 이보 후퇴해도 된다. 잠시 주저앉아도 된다. 신발만 벗지 말자.

 

 

그들은 단지 금만을 구했네.

 

 

2부에서는 산티아고와 연을 맺는 몇몇 인물들이 나온다. 모든 것을 금으로 만드는 연금술을 배우려고 연금술사를 만나러 가는 영국인, 여행을 인도하는 낙타 몰이꾼, 사막의 여인 파티마, 그리고 연금술사. 다들 산티아고가 세상과 타인에 대해 관계 맺음으로 어떻게 성장해가는지를 보여주는 인물들이다. 그래도 가장 중요한 인물은 연금술사다. 연금술사는 만물의 이치를 아는 자로써 현자 같은 존재다.

 

연금술사가 하는 이야기들이 작가의 생각을 가장 잘 담아내고 있는 것 같다. 많은 구절들이 맘에 와닿았지만 특히 이 구절을 소개하고 싶은 마음이 강하게 들었다. '금만 구했다'라는 말이 2번이나 등장하면서 어김없이 자아의 신화를 이루지 못함과 연결이 되는 것이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 것 같다. 책에서 이야기하는 금이라는 게 부자가 되게 하는 자본이라는 수단이 아니라 연금술사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의 신화를 이루어가는 수단으로 설명이 된다. (부의 상징으로써 금이 나오기도 한다.) 금은 만드는 게 그들의 목적이 아니다.

 

'금만 구했다'라는 말이 '금을 만드는 능력은 만들 생각도 하지 않고, 금만 원하는 간절함'이란 말은 아닐까?

예를 하나 들어볼까 한다.

로또 1등 당첨이 되면 그 돈으로 잘 살 수 있을까? 절대 아니라고 생각한다. 돈을 경영할 능력의 부재는 돈을 소비의 수단으로 보게 할 뿐, 더 큰돈을 벌 수 있는 기회로 보지 못하게 한다. 당첨금이 자본이 되려면 내가 먼저 자본가로서의 자질이 있어야 한다. 준비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준비는 곧 성장을 의미한다. 부자가 된다는 것이 돈이 많은 사람을 뜻하는 단어가 아니라 재화를 창출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고 정의를 내려야 되지 않을까 싶다.

 

간절함 때에 따라 좋지만, 조급함은 경계해야 한다. 대부분의 포기와 실망은 조급함에서 오고, 자신밖에 모르도록 사람을 변질시킨다. 그러면 더 원하는 바를 간절하게 원하게 되고, 그렇지 못한 오늘 이상과 현실의 괴리 사이에 갈등하고 괴로워하게 된다.

 

 

"내가 되고자 하는 모습이 내일 당장 이루어진다면, 현재의 내 능력으로 감당할 수 있는가?"

 

매일 질문해보며 성공으로 점을 찍으려 하지 말고 성장이라는 선을 긋는 매일의 삶을 살려고 노력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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